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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 2.0]]”한국 사람에게 맞는 장애인 이동보조기구, 이제는 세계로”

입력
2019.10.21 04:00
수정
2019.10.21 13:46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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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영 이지무브 대표

오도영 이지무브 대표.
오도영 이지무브 대표.

“2010년 척수장애인이 찾아와 화재 사고가 발생하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은 건물에서 탈출할 수 없다고 했어요. 엘리베이터 작동이 멈추면 비상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척수장애인은 목 또는 허리 이하를 움직일 수 없거든요. 그들을 위한 피난기기를 만든 것이 이지무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동보조기기 제조 사회적기업 ‘이지무브’의 오도영(53) 대표는 9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이 같이 말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에 장애인, 노인 등 이동약자를 위한 피난기기가 소화기처럼 비치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보급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이동약자용 피난기기를 제작하는 국내 업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재활공학자 출신인 오 대표는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자는 생각으로 ‘KE휠체어’를 개발했다.

KE휠체어는 계단 위에 펼쳐 놓고 뒤에서 밀면 안전하게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는 제품이다. 별 다른 동력이 필요 없기 때문에 화재, 지진 등 비상 상황에서 이동약자들의 탈출을 위해 꼭 필요한 제품이다. 실제 2001년 미국 9ㆍ11 테러 당시에도 중증장애인이 피난기기를 이용해 탈출했다.

오 대표는 “처음에는 해외 제품을 국내에 보급하는 것도 생각했지만, 우리나라 사람 체형에 안 맞아서 불편했고 가격이 대당 2,500달러(약 295만원)로 너무 비쌌다”며 “1년 가량 연구해서 개발한 KE휠체어는 해외 제품보다 1,000달러 이상 저렴하면서 훨씬 견고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무브의 등장은 국내 재활기기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당시 국내 재활기기 업계는 독과점 시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품, 가격, 서비스 등에서 소비자들의 불만이 적잖았다. 이지무브는 사업 시작과 함께 저가격 고품질 제품 공급, 원데이 서비스 제공, 정직한 영업 등을 내세웠다. 가장 먼저 변화가 나타난 것은 시장 가격이다. 이지무브 제품은 가격이 해외 제품보다 훨씬 낮았다. 때문에 해외 제품을 수입해서 비싸게 판매하던 다른 업체들도 점차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이지무브 제품.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KE 휠체어, 아이체어 프로, 이지 체어 엠, 파워휠체어. 이지무브 제공
이지무브 제품.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KE 휠체어, 아이체어 프로, 이지 체어 엠, 파워휠체어. 이지무브 제공

오 대표는 서비스 개선에도 큰 역할을 했다. 장애인 보조기구나 재활기구는 그들의 삶에서 ‘수족’과도 같다. 하지만 당시 다른 업체들의 서비스는 2~3개월 가량 소요됐다. 고객들이 불만을 제기해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오 대표는 고객이 수리 요청이나 불만을 제기하면 하루에서 최대 3일 안에 처리해주는 ‘원데이 서비스’를 실시했다. 고객 만족도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덕분에 다른 업체 제품을 쓰다 바꾸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 결과 다른 업체들도 서비스 기간을 2~3주 정도로 단축했다.

오 대표는 “장애인 보조기구나 재활기기는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이지무브 제품은 사실 채산성이 많이 떨어진다”며 “그렇지만 이익을 사회와 공유하는 기업의 모토에 맞춰 경영했고, 그런 노력이 시장 전체에 퍼져 소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개선된 점에 보람이 크다”고 했다.

이지무브가 만든 제품들은 이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다. 2012년부터 이동약자용 피난기기 수출을 시작해 현재 싱가포르, 일본, 네덜란드, 터키 등에서 이지무브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저렴한 가격과 높은 품질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오 대표는 설명했다.

이지무브는 2010년 현대자동차그룹이 자본 100%를 투자해 설립됐다. 이 중 70%는 공익법인 10곳에 증여해 현재 독립적으로 경영되고 있다. 지금까지 현대차그룹으로부터 연구개발(R&D), 홍보 등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경영의 독립권은 지켜지고 있다. 그만큼 자생력을 갖춘 기업이라는 뜻이다.

사실 오 대표는 이지무브 설립 전까지는 기업의 수장이 될 생각이 없었다. 2007년 현대차그룹이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문위원으로만 참여했다. 하지만 사업 설계와 회사 설립 과정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부, 시민사회, 기업 등에서 오 대표에게 경영을 맡으라 설득했고, 결국 받아들이면서 이지무브 대표 자리를 짊어졌다.

지난 7월 5일 대전 수성구 대전컨벤션에서 열린 '2019 사회적경제 활성화 유공 포상 수여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이지무브의 오도영 대표(오른쪽)와 방기선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지무브 제공
지난 7월 5일 대전 수성구 대전컨벤션에서 열린 '2019 사회적경제 활성화 유공 포상 수여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이지무브의 오도영 대표(오른쪽)와 방기선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지무브 제공

오 대표는 “재활공학 박사이면서 정보기술(IT) 기업, 대기업 등에서 근무한 이력 때문에 회사 경영을 맡게 됐다”면서 “사회적기업도 수익성 확보가 필요하기에 흑자전환까지만 성공시키고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벌써 9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실제 이지무브는 2015년 첫 흑자전환에 성공해 지금까지 매년 수익을 내고 있다. 올해 7월에는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까지 수상했다.

오 대표는 내년 창립 10주년을 바라보며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적기업은 좋은 취지를 갖고 사업을 시작하지만, 후원 없이는 수익을 내지 못하는 곳이 많다. 예를 들어 정부가 진행하는 공공 정책자금을 지원받으려고 해도 신용보증기금 심사를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때문에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뜻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문을 닫는 곳도 많이 있다.

오 대표는 “사회적기업이 일반 기업과 비교해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은 굉장히 큰 문제이고, 이는 결국 제2, 제3의 이지무브를 탄생시키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면서 “영세 업체의 경우 초기 생존을 위한 자금 수혈이 필요한데, 정부의 따뜻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류종은 기자 rje3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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