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범죄, 당신을 노린다] <15> KT ENS 대출 사기 사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지능범죄 시리즈는 매주 화요일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부정대출 흐름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 때만 해도 은행들끼리 서로 대출해주려고 난리였죠.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까 제 발로 사기 당하겠다는 거였지만요."

사기 피해액은 6년간 1조7,900억원, 사기 피해자는 제1금융권을 비롯한 16개 은행이었다. 기가 막힐 법한 초대형 금융 사기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원인은 간단했다. 대기업이란 간판만 보고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부실심사, 그리고 허술한 인감관리. KT ENS 대출 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내부자와의 공모, 범죄의 시작 

2007년 한 업체 영업이사였던 전모씨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회사는 KT ENS에 휴대폰 액세서리를 납품하던 업체. KT ENS가 주는 매출 채권으로 은행 대출을 받곤 했는데, 은행이 이 대출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심사하지 않더라는 걸 눈 여겨 봤다. 그럴 만도 한 것이, KT ENS는 KT그룹 내 시스템과 네트워크 등을 담당하는 회사라 KT가 망하지 않는 이상 절대 무너질 수 없는 회사다.

전씨는 따로 회사를 차린 뒤 대표가 됐고, 잘 알고 지내던 KT ENS의 영업부장 김모씨를 꾀어냈다. 김 부장은 KT ENS에 납품할 업체, 물품 등을 선정하고 대금 결제 업무 등을 맡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전 대표는 김 부장 손에다 회사 명의의 법인카드, 그리고 2억원의 현금을 쥐어줬다.

범죄의 시작이었다. 김 부장이 전 대표에게 각종 물품을 납품받았다며 허위로 매출 채권을 발급해주면, 그 채권을 가지고 은행 대출을 받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대출 심사가 허술한 제2금융권을 찾았다. 제2금융권과 거래를 뚫고 난 뒤엔 일사천리였다. KT ENS라는 듬직한 회사가 보증하는, 그것도 제법 규모가 큰 액수의 대출이 발생하자 이번에는 은행들이 먼저 전 대표를 찾아와 자기네 돈을 써달라고 할 정도였다.

길이 열리자 전 대표와 김 부장은 더 대담해졌다. 일단 빌린 돈의 상환은 돌려막기로 때웠다. 상환 스케줄을 조정, A은행에서 빌린 돈을 B은행에, B은행 만기가 다가오면 C은행에서 다시 빌리는 방식이었다. 정교하고 완벽했다. 범행을 벌이던 6년간 단 한번도 들키지 않았다. 그 어느 은행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 대표와 김 부장은 한 걸음 더 나가 회사를 불리기 시작했다. 회사 규모가 커지고, 회사 숫자가 많아져야 매출 채권을, 대출을 더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 대표는 회사 7개를 새로 만들었고 후배들을 '바지사장'으로 앉혔다. 이렇게 작업해 빼돌린 돈으로 외제차를 사고, 이런저런 사업도 벌였다. 해외 원정 도박으로 수십억원을 날리기도 했다.

 ◇의심하던 감찰과, 무슨 죄인지 몰랐다 

이들의 범행은 우연히 들통났다. KT ENS 내부 감찰과에서 김 부장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를 둘러싼 자금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김 부장이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고민하고 있던 차에 김 부장이 해외로 나갈지도 모른다는 제보를 받아 바로 김 부장을 잡아다 경찰서에 넘겼다.

상황은 급박했다. 이미 비행기 표를 끊어뒀던 김 부장은 그 순간만 모면하면 그만이었다. 경찰로서는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김 부장을 끌고 온 감찰과 직원 말만 믿고 김 부장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김 부장과 마주 앉아 이야기하던 그 때, 강성운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팀장 눈에 들어온 건 김 부장이 손에 꽉 쥐고 있던 노트북이었다.

'떳떳하면 보여주면 그만 아니냐’고 김 부장을 압박한 끝에 노트북을 열어봤다. 그렇게 꼭 쥐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노트북엔 대출 자금 흐름을 정리한 한 장짜리 엑셀 파일이 들어 있었다. 은행 상환일자 별로 자금을 돌려 막아야 할 처지라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파일 자료만으로 대출 규모가 2,000억원 이상이었다. 강 팀장은 곧바로 김 부장에 대한 ‘면담’을 ‘수사’로 전환했다.

행운도 따랐다. 사기 사건 수사는 정보가 새어나가는 순간 망한다. 돈푼 깨나 만지던 동업자들이 그 즉시 해외로 도주해버리기 때문이다. 강 팀장은 "급히 체포영장을 받고 수사를 진행하려는데, 그날 마침 당직 검사가 금융조사부 소속이었고, 또 마침 그 하루 전날 이상한 대출이 있다며 몇몇 은행이 금융조사부에다 진정서를 넣어둔 상태였다”고 전했다.

그 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은행이 낸 진정서를 보니 전 대표와 김 부장을 비롯, 일당 8명의 인적 사항이 들어 있다. 곧바로 공범들에 대한 출국금지와 체포에 들어갔다. 지능범죄수사대 3개팀이 이 사건에 달라 붙었다. 김 부장이 가지고 있던 회계자료를 분석하고,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구속했다. 두 달간 수사 끝에 규모만 1조7,900억원에 달라는 사기 대출임을 밝혀냈다.

수사를 하다 보니 이들의 대담한 범행 배경 하나가 더 드러났다. 금융감독원 직원이 매수된 것. 사실 금감원은 KT ENS 주변의 수상한 대출 흐름을 보고 내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그러자 전 대표 일당 중 한 명은 자신의 고향 선배인 금감원 팀장 김모씨를 끌어들였다. 김 팀장에게 자신들이 투자한 땅을 주겠다 회유하면서 금감원의 내사 정보를 얻어갔다. 내사 정보뿐 아니라, 대출 사기 작업을 할 때 중간에 특수목적법인(SPC) 같은 걸 끼워 넣으면 경찰이나 금융 당국의 자금 추적이 어려워진다는, ‘범행의 팁’까지 받아갔다.

 
역대 초대형 대출사기 사고. 그래픽=강준구 기자
 ◇남태평양 섬에서 부랑아가 된 범인 

가장 핵심 주범, 전 대표는 2014년 2월 이미 해외로 도주했다. 홍콩, 마카오를 거쳐 남태평양에 위치한 바누아투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우리나라와 사법공조가 되어있지 않은 나라라 더 이상 추적이 불가능했다. 경찰로서는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신청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 대표는 2015년 11월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면서 현지 수사 당국에 체포, 국내로 송환됐다. 전 대표는 사기 친 돈으로 해외에서 고급 단독주택에서 거주하는 등 호화 생활을 해왔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도피 자금이 떨어져 부랑자 생활을 하다 내쫓긴 것이었다.

1조7,900억원대 사기 범죄로 전 대표는 결국 징역 25년 확정판결을 받았다. ‘단군 이래 최대 사기사건’이라던 '장영자ㆍ이철희 어음사기 사건'(15년형)이나 다단계 회원 약 9만명에게 2조원대 사기행각을 'JU그룹 주수도 회장 사기 사건'(12년형)보다도 높은 형량이었다.

대출사기 피해 은행 및 금액. 그래픽=강준구 기자
 ◇“은행도 순수한 피해자는 아냐” 

주범에게 징역 25년형까지 선고된 큰 사건이었음에도 그 뒤에도 금융권 대출 사기 사건은 여전하다. 2015년 전자업체 M사는 가짜 서류로 7년 동안 3조4,000억원의 불법대출을 받은 사실이 적발됐다. 수사 결과 이들은 대출 알선을 위해 국책 금융기관, 세무당국. 거래업체 등에 8억원이 넘는 로비 자금을 뿌렸다.

김 팀장은 사기 대출 사건이 줄지 않는 배경으로 금융권의 부실한 심사 체계를 꼽았다. 그는 “KT ENS사건만 해도 대출 서류를 제출한 업체가 위치해있다는 공장 한 곳만 실제 방문해봤어도 대출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며 “그런데 은행은 KT라는 대기업의 인감도장이 찍힌 서류만 보고도 바로 대출을 해줬다”고 말했다.

대출 과정이 엉터리였다는 건 상대 측에서도 뼈아프게 지적했다. 김 부장 측 변호인은 사기 대출에는 은행의 책임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재판 과정에서 “은행들은 2010년부터 전자세금계산서를 발급하도록 한 규정을 어기고 종이세금계산서 사본을 증빙한 후 대출을 내줬다”며 "상환 기간을 3개월로 짧게 잡은 단기대출로 1조8,000억원대 대출을 진행해 거액의 이자와 수수료를 받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은행도 마냥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진짜 피해자는 누굴까. 은행들은 경찰 수사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사기 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전 대표 등 일당이 소유한 공장, 땅, 차량, 예금 등을 압류했다. 그럼에도 대출액 가운데 2,900억원 정도는 메우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팀장은 “은행들이야 이런 상황을 가정하고 보험 가입을 해뒀기 때문에 상당액을 보전받았을 것”이라며 “결국 피해는 금융사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