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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짜리 동전만한 길고양이 ‘여리’의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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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원짜리 동전만한 길고양이 ‘여리’의 목숨

입력
2019.06.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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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길고양이 '여리'
응급 치료를 받고 있는 길고양이 '여리'

며칠 전,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캣맘이자 동네 이웃에게 제작을 부탁한 것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그런데 공방 앞에 통덫이 두 개나 놓여 있었다. 밥을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 중에 ‘여리’라는 아이가 3주 전부터 목에 철사가 감긴 채로 다녀서 포획하려는 중이라고 했다. 도심의 길고양이가 올무에 걸렸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철사에 감긴 목 주변에 상처가 점점 심해져서 속살이 다 드러났다고 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으니 염증이 심해지면 위험할 수 있었다. 구조가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그날 밤에 포획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리는 이제 살았구나. 가슴을 쓸어 내렸다. 병원에 가서 마취한 후에야 몇 주 동안 아이 목을 옥죄었던 철사를 풀 수 있었다. 구조자들이 올린 사진을 보니 철사 둘레는 고작 ‘500원짜리 동전’만 했다. 그렇게 목이 조인 채 살아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였다. 꽤 굵은 철사였다. 수의사는 누군가 도구를 이용해 꼼꼼하게 매듭까지 지으면서 의도적으로 철사를 감은 것이라며 욕을 내뱉었단다. 무엇이 아무 방어도 못하는 동물에게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하게 만들었을까. 여리가 살던 곳은 캣맘들이 중성화 수술도 잘 시키고 관리를 잘해서 딱히 갈등도 없는 곳이었다. 여리도 중성화수술을 했다는 표식으로 왼쪽 귀의 일부가 잘려 있다. 인간과 함께 살아 보려고 귀를 내주었는데 끝내 목까지 졸리고 말았다.

'여리'의 목을 죄고 있던 철사의 둘레는 고작 '500원짜리 동전'만 했다.
'여리'의 목을 죄고 있던 철사의 둘레는 고작 '500원짜리 동전'만 했다.

여리 일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라서 내가 더 흥분하는 것일 뿐,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디에서는 많은 길고양이가 여리만큼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다. 수원에서 입양을 코앞에 두었던 길고양이는 안구가 돌출되고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진 채 발견되었고, 부산에서는 허리가 잘린 길고양이가 발견되었고, 서울에서는 길고양이가 몸에 나뭇가지가 박힌 채 죽어 있었다. 불에 그을리고, 독극물을 먹고, 신체가 잘리고, 구타당해 피투성이가 된, 기사화되지 못한 길고양이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하지만 길고양이 학대 사건은 수사가 신속하게 진행되지도, 범인이 잡혔다고 해도 제대로 된 죗값을 묻지도 않는다.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 우리 사회에서 길고양이의 사회적·법적 지위는 길 위의 돌멩이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만 동물에게 폭력적인 걸까. 요즘은 뉴스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약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도를 넘었는데 이게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나라들도 1990년대 이후부터 동물학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동물학대의 사회학>의 저자이자 사회학자인 클리프턴 플린은 동물학대가 과거에 무시되어온 이유는 동물의 가치가 인간에 비해서 낮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고, 최근 들어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동물학대가 인간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국내에서도 유영철, 강호순 등의 연쇄살인자들은 동물을 학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락우드와 처치의 1998년 연구에 따르면 연쇄살인자들의 36퍼센트가 아동기에, 46퍼센트가 청소년기에 동물을 죽이고 고문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인간폭력과의 연관성과 상관없이 동물학대는 그 자체로 중요한 사회 문제이다. 동물학대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며, 권력과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폭력을 이용하고 타자의 감정을 무시하는 법을 학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지만 인간은 이기적이라서 동물학대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연관이 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고 나서야 발 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은 모든 주에서 동물학대를 중범죄로 처벌하고, 동물학대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하는 주도 늘고 있다.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것은 최대 10만 달러의 벌금과 5년 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작은 생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작은 생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칼럼을 쓰고 있는 방금 전, 공방에서 연락이 왔다. 여리가 떠났다고. 갑자기 심정지가 왔다고 했다. 여리는 목 신경 손상이 심해서 응급수술을 한 후 회복 중이었다.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해서 한시름 놓았는데…. 몇 시간 전까지 살고자 밥을 먹던 생명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여리 목에 철사를 감았던 인간은 수사나 체포에 대한 위협도 느끼지 않은 채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지. 그 다음 대상이 또 길고양이일지, 인간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동물학대의 종결이 모든 폭력의 종결에 중요한 한 걸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보경 책공장 더불어 대표

<동물학대의 사회학>, 클리프턴 플린, 책공장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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